글로벌 첨단산업의 패권 경쟁은 그야말로 분초를 다투는 속도전이다. 반도체와 인공지능(AI)은 누가 먼저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상용화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미래와 기업의 운명이 갈리는 냉혹한 전쟁터다.
세계 주요국들이 연구개발(R&D) 인력과 전문인력이 기술 개발에 몰입할 수 있도록 노동시간 규제를 유연하게 운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제조 역량을 갖춘 대한민국은 과연 이런 경쟁에 제대로 대비하고 있는가.
현실은 답답하다. 획일적인 주 52시간 근로제에 묶인 채, 노사가 합의하고 근로자가 더 일할 의사가 있어도 산업의 특성과 업무의 긴급성에 맞춰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일본은 규제를 풀고, 우리는 논쟁만 반복한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최근 시간외근로에 대한 행정지도를 완화하기로 한 것은 첨단산업 경쟁과 노동시장 변화에 대응해 기업과 근로자의 선택권을 넓히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은 이미 고소득 전문직과 연구개발 인력의 근로시간 규제를 완화하는 제도를 도입해 왔다. 저출생·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과 첨단산업 경쟁 심화라는 현실 속에서 노동시간을 획일적으로 통제하기보다 업무 특성에 맞게 유연하게 운영하려는 것이다.
미국 역시 고소득 전문직 등에 대해 일정한 요건 아래 근로시간 규제를 달리 적용하고 있다. 대만과 싱가포르도 산업과 직군의 특성을 고려해 노동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제도를 갖추고 있다.
물론 각국의 노동제도와 산업구조가 서로 다른 만큼 단순 비교는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있다.
첨단산업 경쟁에서 시간과 인력의 유연성이 중요한 경쟁력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만 과거의 획일적인 노동시간 규제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노동자 보호와 산업 경쟁력은 양자택일이 아니다
주 52시간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은 노동자 보호와 산업 경쟁력을 서로 대립하는 가치로만 볼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거나 취약한 노동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은 분명히 지켜져야 한다. 과로와 건강 악화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도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노동자를 동일한 기준으로 묶는 방식이 과연 공정한지도 따져봐야 한다.
첨단산업 연구자나 고도의 전문성을 가진 기술자가 중요한 프로젝트의 마지막 단계에서 집중적으로 일하고 싶어도 일률적인 근로시간 규제 때문에 업무를 중단해야 한다면 국가 경쟁력 측면에서도 손실이 될 수 있다.
특히 고도의 전문직 가운데는 더 일하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규제가 아니라 자율성과 보호를 함께 보장하는 정교한 제도다.
노사 합의를 전제로 하고, 충분한 보상과 건강 보호장치를 마련하며, 일정 시간 이상의 연속 휴식을 보장하는 방식 등으로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노동자 자신의 선택권까지 제한해서는 안 된다.
메가특구만 풀어서는 안 된다
정부가 첨단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특정 지역과 산업에 근로시간 특례를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면 그 자체는 논의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특정 지역에만 규제를 완화하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반도체 산업은 공장 하나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본사와 연구소, 설계회사, 장비·소재 기업, 소프트웨어 기업 등 수많은 주체가 하나의 생태계를 이룬다.
수도권의 연구개발 인력은 주 52시간에 묶여 있는데 특정 지역의 생산현장만 규제를 완화한다면 산업 전체의 시너지를 제대로 끌어내기 어렵다.
지역별·업종별 특례를 계속 늘리는 방식보다는 보다 근본적인 노동제도 개편이 필요하다. 산업과 업무의 특성에 따라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운영할 수 있는 전국적인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이제는 노사 합의에 더 많은 권한을 줘야 한다
노동시간 제도의 핵심은 정부가 모든 근로시간을 일률적으로 정해주는 데 있지 않다. 노동자를 보호하면서도 노사가 산업과 업무의 특성을 반영해 합리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특히 반도체와 AI처럼 기술 변화가 빠르고 연구개발의 연속성이 중요한 분야는 일반적인 노동시간 체계와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노사가 합의하고, 근로자가 자발적으로 선택하며, 그에 따른 충분한 보상과 건강 보호장치가 마련된다면 획일적인 시간 총량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를 악용해 노동자에게 사실상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는 기업이 생기지 않도록 엄격한 감독과 처벌도 병행해야 한다.
자율에는 책임이 따라야 하고, 유연성에는 안전장치가 따라야 한다. 이것이 제대로 된 노동시장 개혁이다.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일하는 시간'이 아니라 '일할 수 있는 자유'다
인공지능 시대에는 단순히 오래 일하는 것이 경쟁력이 아니다. 얼마나 빠르게 연구하고, 얼마나 집중적으로 개발하고, 얼마나 신속하게 기술을 상용화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세계 각국의 기업들이 기술개발 속도를 높이기 위해 제도를 바꾸는 상황에서 대한민국만 획일적인 근로시간 규제에 머물러 있다면 결국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반도체와 AI는 국경이 없다. 미국의 기업과 중국의 기업, 대만과 일본의 기업이 하루 24시간 세계 시장을 놓고 경쟁하는데 대한민국 기업만 국내 노동시간 규제에 발목이 잡힌다면 그것은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의 문제가 된다.
정부와 정치권, 노동계가 이제는 새로운 해법을 찾아야 한다. 노동자를 보호하되 노동의 자율성을 확대하고,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되 노동자의 건강권을 침해하지 않는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노동을 존중하는 경영'과 '경영을 이해하는 노동'이 함께 가야 한다. 노사 합의를 존중하고, 산업별 특성을 인정하며, 전문직과 연구개발 인력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노동시간 제도를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
주 52시간제 자체를 선악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산업구조와 글로벌 경쟁환경에 맞게 어떻게 진화시킬 것인지가 중요한 시점이다.
기술 패권 경쟁에는 골든타임이 없다
반도체와 AI 경쟁에서 한 번 뒤처지면 다시 따라잡는 데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 정부가 규제개혁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부처 간 이견과 정치적 논쟁에 발목이 잡혀 시간을 허비한다면 그 피해는 결국 기업과 노동자, 그리고 국민에게 돌아간다.
대한민국은 이미 세계적인 기술력을 증명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 기술력이 세계 시장에서 계속 앞서갈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는 일이다.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과 국가 경쟁력을 지키는 것은 결코 양자택일이 아니다. 강제적인 장시간 노동은 막되, 일하고 싶은 사람과 더 집중해서 일해야 하는 산업에는 합리적인 선택권을 줘야 한다.
기업에는 책임을 요구하고 노동자에게는 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 그것이 노동시장 유연화의 출발점이다.
대한민국이 반도체와 AI 강국의 지위를 지키려면 이제 낡은 규제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술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세계가 1초를 다투며 달리고 있는데 대한민국만 규제의 벽 앞에서 멈춰 있어서는 안 된다.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면서도 기업과 국가가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새로운 노동시장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규제를 위한 규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유연성과 경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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