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둥식 구조·설비 분리 설계로 구조체 장수명화…초기 공사비보다 생애주기 비용 따져야
- 국토부 장수명 주택 인증제도 운영에도 보급은 한계…제도 실효성 높일 정책 전환 필요
[세계뉴스 = 전승원 기자] 아파트를 지은 지 30년이 지나면 철거하고 다시 짓는 주거 방식에서 벗어나, 구조체는 오래 사용하고 노후 배관과 설비, 내부 공간만 교체하는 '장수명 주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철근콘크리트 구조체의 내구성을 높이고 설비 교체와 평면 변경이 쉽도록 설계하면 건물 전체를 철거하지 않고도 주거 성능을 유지할 수 있다. 재건축 과정에서 발생하는 건설폐기물과 자원 낭비를 줄이고, 장기적인 유지관리 비용을 낮출 수 있다는 점도 장수명 주택의 장점으로 꼽힌다.
국토교통부가 관련 건설·인증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일반 아파트 시장에서의 보급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초기 공사비를 낮추는 데 집중해 온 주택 공급 구조를 생애주기 비용과 장기 사용 관점에서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 '30년 재건축'은 의무가 아니다…구조적 한계가 재건축 유인
국내 아파트의 재건축 연한은 흔히 30년으로 알려져 있다. 2015년 제도 개편으로 재건축 가능 연한이 최장 40년에서 30년으로 단축되면서, 준공 후 30년이 지난 공동주택은 관련 요건을 충족할 경우 재건축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30년이 지났다고 반드시 철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건축물의 노후도와 안전성 등 관련 요건을 충족해야 하지만, 준공 30년 전후가 재건축 논의가 본격화하는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건물의 구조적 수명과 재건축 추진 시점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골조를 더 사용할 수 있더라도 배관·배선의 노후화, 평면 변경의 제약, 주차장 등 주거환경 개선 수요가 겹치면 전면 재건축이 대안으로 떠오를 수 있다.
국내 아파트에 널리 적용된 벽식구조는 벽체가 건물의 하중을 지탱하는 방식이다. 구조가 비교적 단순하고 시공에 유리하지만, 구조벽을 바꾸기 어려워 내부 공간을 재구성하는 데 제약이 따른다. 배관·배선도 바닥이나 벽체에 매립된 경우가 많아 점검과 교체가 쉽지 않다.
이처럼 유지·보수와 공간 개선이 어려운 구조는 골조의 실제 수명과 별개로 주택의 실질적인 사용 기간을 단축하고 재건축 수요를 키우는 요인이 될 수 있다.
■ 벽식구조에서 기둥식으로…구조체와 설비 분리가 핵심
장수명 주택의 핵심은 건물의 뼈대와 교체가 필요한 설비를 분리해 설계하는 데 있다.
기둥과 보가 하중을 지탱하는 라멘구조는 내부 칸막이를 구조체와 분리하기 쉬워 평면 변경에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여기에 설비 공간과 배관 점검구를 확보하고, 교체가 쉬운 배관 시스템을 적용하면 거주자의 생활 방식이 바뀌거나 설비가 노후화했을 때 필요한 부분만 보수할 수 있다.
국토교통부의 장수명 주택 관련 기준도 내구성뿐 아니라 가변성과 수리 용이성을 주요 요소로 다룬다. 기둥식 구조, 이동이 쉬운 칸막이벽, 층상배관, 공용·전용 설비의 분리, 설비 여유 공간과 점검구 등이 대표적인 설계 요소다.
다만 기둥식 구조를 적용하는 것만으로 장수명 주택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배관 교체 과정에서 다른 세대의 천장을 뜯거나 구조체를 훼손하지 않도록 설계 단계부터 점검·보수 동선을 확보해야 한다. 구조체의 내구성과 설비의 교체 가능성을 함께 고려해야 장기 사용이 가능하다.
■ 세종시 실증단지…초기 공사비보다 생애주기 비용 따져야
장수명 주택은 개념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등은 세종시에서 장수명 주택 실증사업을 추진했으며, 2019년에는 세종 블루시티에 100년 수명을 목표로 설계한 주택이 준공됐다.
실증사업은 구조체의 내구성을 높이는 동시에 설비 교체와 내부 공간 변경을 쉽게 하는 설계의 적용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장수명 주택의 경제성을 판단하려면 초기 건축비뿐 아니라 장기간의 유지·보수 비용과 향후 철거·재건축 부담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물론 장수명 주택이 모든 조건에서 경제적으로 유리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초기 공사비와 구조 방식, 층고, 유지관리 비용, 리모델링 수요, 토지 가치 등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특정 실증사업의 성과를 모든 공동주택에 그대로 적용해서도 안 된다.
다만 구조체를 유지하면서 노후 설비만 교체할 수 있는 주택은 전면 철거와 신축에 따른 자원 소비를 줄일 수 있다. 단기적인 분양 원가에 치우치지 않고 건물의 전체 사용 기간에 발생하는 비용을 기준으로 경제성을 평가해야 하는 이유다.
■ 인증제도 넘어 보급 확대…초기 비용 장벽 풀어야
장수명 주택의 보급이 더딘 배경에는 초기 건설비 부담이 있다. 구조체의 내구성을 높이고 설비 교체 공간과 내부 가변성을 확보하려면 설계·시공 단계에서 추가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 반면 유지관리 비용 절감 효과는 장기간에 걸쳐 나타나 건설사가 초기 투자 부담을 떠안는 구조다.
보급 확대를 위해서는 인증제도 운영을 넘어 초기 비용과 장기 편익을 함께 평가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공공주택부터 장수명 설계를 확대하고, 실제 유지·보수 비용과 자원 절감 효과를 장기간 추적해 민간에 적용할 수 있는 표준 모델을 마련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재건축과 리모델링의 경제성을 비교할 때도 구조적 안전성뿐 아니라 배관·배선 교체 가능성, 평면 변경의 용이성, 공사 중 거주자의 부담, 철거 폐기물 처리 비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골조를 더 사용할 수 있는데도 설비 교체와 공간 개선의 어려움 때문에 전면 철거를 선택하는 구조라면 설계와 제도 모두 개선할 여지가 있다.
■ 100년 주택의 조건…튼튼한 골조와 지속 가능한 유지관리
100년 장수명 주택은 콘크리트만 튼튼하게 짓는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철근 부식과 균열을 억제할 수 있는 내구성 설계, 배관과 배선의 교체 용이성, 내부 공간의 가변성, 지속적인 점검과 유지관리 체계가 함께 갖춰져야 한다.
기둥식 구조 역시 만능 해법은 아니다. 공사비와 층고, 차음 성능 등 설계·시공상 고려할 요소가 있으며, 구조 방식만 바꾼다고 건물의 수명이 자동으로 100년으로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주택정책의 평가 기준도 '얼마나 싸게 지을 것인가'에서 '얼마나 오래, 적은 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구조체는 오래 유지하고 노후 설비와 내부 공간은 필요에 따라 교체하는 체계가 자리 잡으면 재건축에 대한 의존도도 낮출 수 있다.
준공 30년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철거와 신축을 우선하는 관행에서 벗어나, 기존 주택을 얼마나 오래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부터 따져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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